영화 <볼레로: 불멸의 선율> 리뷰 – 고통과 집념이 빚은 선율, 모리스 라벨의 초상

장르: 드라마
국가: 프랑스
등급: 12세 이상 관람가
러닝타임: 121분
배급: 찬란
영화 <볼레로: 불멸의 선율>은 전 세계인이 사랑하는 음악 ‘볼레로’를 탄생시킨 프랑스 작곡가 모리스 라벨(Maurice Ravel)의 삶과 창작의 이면을 그린다. 정교하고 절제된 오케스트레이션으로 인상주의 음악의 흐름을 이끈 라벨은, 드뷔시와 자주 비교되지만 고유한 음악 언어를 지닌 예술가로 평가받는다. 그는 한 곡을 완성하기까지 끊임없는 고통과 실험을 거치며, 삶과 예술 사이에서 흔들리는 인간이었다.
라벨은 로마 대상 경쟁에서 연거푸 탈락하며 음악계 주류로부터 소외당했고, 제1차 세계대전에서는 징병이 거부돼 자원 운전병으로 복무했다. 어머니의 죽음과 병약한 체질, 점차 악화되는 신경성 질환은 그를 무너뜨렸지만, 동시에 내면의 깊이를 더해주는 자양분이 되었다. <볼레로: 불멸의 선율>은 그러한 라벨의 내면을 오롯이 포착하며, 관객을 단순한 전기영화의 틀에서 벗어나 인간 존재의 근원으로 이끈다.
영화를 연출한 안느 퐁텐(Anne Fontaine) 감독은 섬세한 심리 묘사와 시대극에 탁월한 연출력을 보여준 감독으로, <코코 샤넬>과 <더 이노센트> 등에서 여성과 예술, 신념 사이의 갈등을 깊이 있게 풀어냈다. 이번 작품에서도 라벨이라는 복잡한 예술가의 내면과, 그의 음악적 집착을 담백하지만 밀도 있게 풀어낸다.
라벨 역을 맡은 배우 다리우스 페르난데즈(Darius Fernandez)는 오페라 무대와 연극계를 오가며 쌓은 깊이 있는 연기 내공을 바탕으로, 무너지는 천재의 고독과 창작의 광기를 절제된 시선으로 표현한다. 또한 라벨의 뮤즈였던 미시아 세르 역의 레아 드 리마(Lea de Lima)는 1920년대 파리의 예술 세계를 상징하는 인물로, 라벨과의 관계를 통해 이 영화의 정서적 무게중심을 잡는다.
1928년 파리. 무용가 이다 루빈슈타인의 발레 음악 의뢰를 받은 라벨은 새로운 곡을 구상하며, 자신의 과거를 되짚기 시작한다. 반복되는 리듬, 단순한 선율의 변주로 구성된 ‘볼레로’는 처음엔 단순한 실험적 곡으로 출발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것은 라벨의 삶 전체를 대변하는 걸작으로 변모한다. 그는 말한다. “멜로디 없이, 단 하나의 테마로 모든 것을 완성할 수 있을까?” 그 질문은 곧 그의 삶과 맞닿는다.
영화는 단조롭지만 끈질기게 반복되는 리듬이 점층적으로 쌓여가는 ‘볼레로’의 음악 구조를, 라벨의 심리적 고통과 교차 편집하며 그려낸다.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 표현되지 못한 감정, 죽은 어머니에 대한 애도... 라벨은 음악 안에 침묵의 외침을 새기며, 소리로 고통을 조직화한다.
라벨을 연기한 배우는 말수가 적고 감정을 외면하는 듯 보이지만, 절제된 표정과 눈빛 하나로 깊은 감정을 전달한다. 침묵과 고독, 집착과 창작의 경계에서 흔들리는 천재의 모습을 설득력 있게 담아냈다. 감독은 당시 프랑스의 시대적 정서를 담아내는 데에도 탁월한 연출력을 발휘한다. 클래식한 조명, 파리 특유의 황혼빛, 잿빛 창가에서 들리는 음악... 모든 장면은 음악처럼 흐르며 관객을 몰입시킨다.
특히 편집은 ‘볼레로’의 구성과 맞물려 영화 전체를 하나의 악장처럼 구성한다. 음악의 상승 곡선처럼 감정도 고조되고, 마지막 순간에는 더 이상 음표 없이도 전달되는 침묵의 클라이맥스가 찾아온다.
이 영화는 음악 감상의 경험을 확장시킨다. 우리가 익숙하게 듣던 ‘볼레로’가 어떻게 라벨의 인생과 연결되어 있는지를 알게 된 후, 그 곡은 더 이상 단순한 클래식 명곡이 아니다. 반복과 집착, 끓어오르는 정서의 파고가 담긴 ‘생의 기록’으로 느껴진다. 관객들은 “이 음악이 이렇게 아픈 곡일 줄은 몰랐다”, “처음으로 라벨을 인간으로 보게 되었다”는 반응을 보인다.
또한 이 영화는 예술 고전 교육과 감상 수업에 활용하기에 적합한 작품이다. 음악이 어떻게 사회, 개인의 심리와 맞닿는지를 보여주며, 예술이 단순한 아름다움이 아니라 저항과 회복의 언어임을 제시한다.
라벨은 1937년 세상을 떠났지만, 그가 남긴 음악은 오늘날까지도 수많은 이들의 마음을 두드린다. <볼레로: 불멸의 선율>은 그 작품이 만들어지기까지의 숨은 이야기이자, 고통 속에서도 위대한 예술이 탄생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영화다.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에도, 라벨처럼 말없이 버티고 있는 이들에게 이 영화는 오래도록 잔상을 남길 것이다. 영혼 깊숙이 파고드는 선율처럼.
영화를 통해 라벨의 삶과 음악에 매료되었다면, 이제 그의 음악을 귀로 직접 음미해볼 시간이다. 아래 두 영상은 '볼레로'를 더욱 깊이 이해하고 감상할 수 있는 좋은 영상이라 생각된다.
- 서울시립교향악단, 정명훈 지휘, 2012 교향악축제 연주 영상: https://www.youtube.com/watch?v=f4iMjjnXbT4
- @SOSOHAN CLASSIC 김윤경의 해설 영상 "역사상 가장 대박 친 음악 | 중독성 쩌는 라벨 볼레로": 역사상 가장 대중적으로 사랑받는 클래식 ‘볼레로’에 대한 흥미로운 이야기와 배경 해설 https://www.youtube.com/watch?v=cQdwDOEfRt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