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 – <박열>, 조선 청년의 법정 투쟁과 사상의 자유

2017년 이준익 감독이 연출한 영화 <박열>은 일제강점기 조선 청년 박열과 일본 여성 가네코 후미코가 함께 펼친 사상과 언론의 투쟁을 다룬 실화 기반 작품이다. 1923년 관동대지진 이후 일본 정부는 조선인들에게 방화를 조장했다는 명분으로 집단 학살을 자행했고, 그 책임을 전가하기 위한 정치적 희생양으로 박열을 지목했다. 하지만 박열은 침묵하지 않고 오히려 공개 재판을 통해 자신이 ‘천황 폭살 미수’ 혐의를 자청하며 일본 제국주의를 정면으로 비판한다. 영화는 이러한 실제 법정 드라마를 유쾌하면서도 묵직하게 재현하며, 일제의 언론 통제와 사상 억압을 고발한다.
지금 이 시점에 <박열>을 다시 살펴보는 것은 단지 조선의 과거를 되짚는 일이 아니다. 사상의 자유와 언론의 역할, 권력을 비판하는 목소리의 의미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한 질문이다. 영화 속 박열은 물리적인 무력보다 말과 기록을 무기로 싸운다. 그가 법정에서 펼치는 논리와 풍자는 단순한 반항이 아닌, 자기 철학에 근거한 정치적 실천이다. 표현의 자유가 억압당하는 시대마다, 박열 같은 존재는 다시 기억될 필요가 있다.
1923년 관동대지진 직후, 일본 정부는 조선인들이 우물에 독을 풀고 방화를 저질렀다는 유언비어를 퍼뜨려 무차별 학살을 벌인다. 이 혼란을 수습하고자 정부는 조선인 한 명에게 죄를 덮어씌우려 한다. 그 타깃이 된 인물이 바로 박열이다. 무정부주의자였던 그는 일본인 연인 가네코 후미코와 함께 ‘불령사(不逞社)’라는 반제국주의 결사를 조직했고, 천황 암살을 기도했다는 혐의로 구속된다. 그러나 그는 법정에서 오히려 당당하게 자신의 사상을 밝히며 일본 제국주의의 위선을 폭로한다.
박열은 실존 인물로, 1897년 경북 문경 출생이며 일본 유학 중 무정부주의에 심취해 식민지 지배에 저항하는 언론 활동과 집회를 주도했다. ‘불령사’는 실제 존재한 단체로, 조선인 청년들과 일본 내 좌파 세력이 함께 활동했다. 가네코 후미코 또한 실존 인물로, 천황제에 반대하고 조선 독립을 지지한 인물이다. 일본은 관동대지진 이후 조선인 6천 명 이상을 학살한 것으로 추정되며, 박열 사건은 이를 은폐하려는 정치적 조작이었다는 것이 현재까지의 역사적 해석이다.
<박열>은 실제 재판 기록과 박열의 자서전, 가네코 후미코의 수기 등을 기반으로 대사를 구성했다. 영화의 대다수 장면은 실제 발언이나 신문 기록을 충실히 반영한 것이다. 특히 법정 장면에서 박열이 판사에게 “천황을 폭파하려 했다”고 말하는 장면은 과장처럼 보이지만, 실제 진술에 기반을 둔 것이다. 허구적 장치보다 재현의 정확도에 집중한 이 영화는 ‘사실을 연극적으로 연출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개봉 당시 <박열>은 언론으로부터 “지식인의 시대적 책무를 유쾌하게 복원한 작품”이라는 호평을 받았다. 이제훈과 최희서의 열연, 특히 후미코 역을 맡은 최희서의 일본어 대사와 감정선은 “올해의 발견”이라 불릴 만큼 인상 깊었다. 일부 관객은 “대사량이 많아 피로감이 있다”고 평했으나, 그만큼 기록 중심의 역사극으로서의 진정성이 돋보였다는 반응도 있었다.
이준익 감독은 “이 영화는 혁명이 아닌 선언”이라고 말했다. 그는 박열의 행동과 언어, 후미코의 신념을 통해 사상과 존엄의 문제를 말하고자 했고, ‘투쟁은 무장만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점을 강조했다. 특히 여성 독립운동가의 시선을 함께 담아낸 점은 기존 남성 중심의 서사를 넘어선 시도로 평가받는다. 이 영화는 우리에게 ‘말로서 싸우는 사람들’의 힘을 상기시킨다.
박열 사건은 단지 한 청년의 반항이 아니라, 일제가 어떻게 공포를 정치화했는지 보여주는 사례다. 또한 조선인 내부에도 다양한 사상과 노선이 존재했다는 점에서, 독립운동을 보다 입체적으로 바라보게 한다. 가네코 후미코처럼 식민지 피지배국의 청년이 타 민족의 독립을 위해 싸운 사례는 희귀하면서도 감동적이다. 이 영화는 '조선인'이라는 정체성을 넘어서, 억압에 저항한 개인의 목소리를 기록한다.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지금 우리가 다시 들어야 할 '작은 혁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