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 – <지슬>, 끝나지 않은 세월의 기억을 예술로 말하다

오멸 감독의 <지슬 - 끝나지 않은 세월2>(2012)는 제주 4·3 사건 당시 무고한 민간인들이 동굴 속에 숨어 지내며 겪은 공포와 절망의 시간을 정적이고도 시적인 방식으로 풀어낸 작품이다. ‘지슬’은 제주어로 감자를 뜻하며, 감자처럼 땅속에 숨어버릴 수밖에 없었던 삶들을 은유한다. 이 영화는 거대한 역사 속에서 말할 수 없었던 목소리들을 가장 고요한 언어로 드러낸다.
국가 폭력과 집단학살이라는 무거운 주제를 다루면서도, 영화는 절제된 연출과 심미적인 화면 구성으로 관객에게 다가간다. 단지 사건을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그 시간의 공기와 침묵, 인간의 내면을 시적으로 담아낸다. <지슬>은 지금도 반복되는 국가 권력의 폭력성과 그에 저항하는 인간의 존엄을 되새기게 하는 작품이다.
1948년 제주, ‘빨갱이’로 몰려 동굴에 피신한 마을 사람들은 점점 바깥 소식과 단절된다. 누가 밀고자이고, 누가 군인 편인지 알 수 없는 긴장 속에서, 이들은 서로를 의심하고 또 보듬는다. 한편 마을로 파견된 군인들 사이에도 갈등이 깊어지고, 결국 피할 수 없는 비극이 찾아온다. 영화는 이 모든 과정을 대사보다 이미지, 감정, 시간의 흐름으로 표현한다.
제주 4·3 사건은 1947년부터 1954년까지 제주도에서 일어난 민중 항쟁과 그에 대한 국가의 무자비한 진압 과정이다. 이 시기 수많은 제주도민이 ‘좌익 세력과의 연루’라는 이유로 고문과 학살을 당했고, 일부는 산속과 동굴 속에 숨어서 생존해야 했다. <지슬>은 바로 이 동굴 속에서 벌어진 사건을 중심으로 이야기한다.
영화는 실제 제주 출신 작가 현기영의 단편 <순이삼촌>에 기반을 두고 있으며, 당시 생존자와 유족의 증언을 참고해 창작된 픽션이다. 그러나 그 감정과 상황은 철저히 역사적 맥락에 기반하며, 허구 이상의 진실을 전달한다. 배우들의 제주어 대사, 흑백 톤의 영상미, 공간의 정서 등이 극사실적 몰입을 더한다.
<지슬>은 2013년 선댄스 영화제에서 월드시네마 심사위원대상, 로테르담 영화제에서 넷팩상을 수상하며 국제적으로도 높은 평가를 받았다. 국내에서는 “한국 독립영화의 쾌거”, “이미지로 완성된 역사영화”라는 평을 받았고, 관객들은 영화가 던지는 고요하지만 묵직한 메시지에 깊은 울림을 느꼈다.
오멸 감독은 “죽음 앞에서도 서로를 위해 감자를 나누는 인간들의 마음”을 이야기하고 싶었다고 밝혔다. 그는 4·3 사건을 단순한 정치적 대립으로 보지 않고, 인간의 생존과 공동체의 파괴, 그리고 그 와중에도 피어나는 연민과 연대를 표현하고자 했다. 영화는 시적 서정성과 역사적 분노를 동시에 담고 있다.
<지슬>은 제주 4·3 사건을 국제적 이슈로 끌어올린 전환점이 되었다. 단지 피해를 고발하는 것을 넘어, 억압 속에서도 인간이 어떻게 존엄을 지켜내는가를 보여준다. 한국 현대사의 아픈 균열을 예술적으로 조명한 이 영화는, 침묵이 강요된 역사를 ‘느끼게’ 만드는 고요한 목소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