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 – <말모이>, 사전을 숨겨 지킨 민족의 말과 마음

엄유나 감독의 <말모이>(2019)는 일제강점기 말기, 조선어학회가 중심이 되어 우리말 사전을 비밀리에 편찬했던 실제 사건을 모티브로 한 영화다. 말 그대로 '말을 모은다'는 뜻의 ‘말모이’는, 민족의 정체성과 문화를 보존하기 위한 마지막 저항이었다. 영화는 무장투쟁도, 정치적 선동도 없다. 하지만 사전을 만들기 위해 목숨을 건 사람들이 있었다는 사실만으로도 깊은 감동을 준다. 황정민과 윤계상의 절제된 연기가 더해져, 영화는 조용하지만 묵직하게 관객에게 말을 건다.
언어는 단순한 소통의 도구가 아니라, 존재의 근거다. <말모이>는 ‘말을 지킨다’는 것이 단지 문화 보존의 차원을 넘어, 식민지 시대의 조선인에게는 존엄을 지키는 행위였음을 보여준다. 오늘날 디지털 시대의 빠른 변화 속에서, 우리가 얼마나 말과 글의 힘을 잊고 있는지 돌아보게 만든다. 이 영화를 다시 본다는 건, ‘우리가 쓰는 말은 어떻게 살아남았는가’를 기억하는 일이다.
1940년대 경성. 글도 못 읽고 생계형 소매치기로 살아가던 김판수(황정민)는 조선어학회에 우연히 발을 들인다. 그곳에서 조용한 학자 류정환(윤계상)을 비롯해 조선어 사전을 만들려는 사람들과 만나게 된다. 처음에는 단순한 생계로 시작된 일이었지만, 판수는 점차 말과 글의 소중함을 깨닫게 되고, 일제의 탄압 속에서도 사전을 끝까지 지키기 위해 싸우게 된다. 조선어학회 사건과 그 배후의 ‘말모이’ 작업이 영화의 중심을 이룬다.
‘말모이’는 1929년 조선어학회(현 한글학회)에서 기획한 최초의 한글 사전 편찬 작업이다. 일제는 조선어 교육을 금지하고, 심지어 한글 문서조차 발행을 금지한 가운데, 학자들과 시민들은 우리말을 비밀리에 기록하고 모았다. 1942년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학자들이 대거 체포되었고, 일부는 고문 끝에 사망했다. 하지만 이들의 작업은 해방 이후 〈큰사전〉의 출간으로 이어졌고, 오늘날 한국어의 뿌리로 남아 있다.
영화는 실화를 바탕으로 하지만, 주요 인물들은 허구다. 김판수는 실제 인물이 아닌 상징적 캐릭터로, 말과 글에 무지했던 평범한 인물이 ‘말의 힘’을 깨달아가는 서사를 통해 관객이 시대와 감정을 이입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반면 류정환은 이극로, 최현배, 장지영 등 실제 조선어학회 학자들의 모습을 복합적으로 담아낸 인물이다. 영화적 각색은 있었지만, 전체 흐름과 사건의 맥락은 역사적 사실에 충실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말모이>는 “말의 힘을 되새기게 한 영화”라는 평가와 함께, 관객들에게 잔잔한 감동을 안겼다. 특히 황정민의 유쾌하면서도 진중한 연기, 윤계상의 절제된 감정선이 높은 평가를 받았다. “자극 없는 영화지만, 끝나고 나면 마음속이 뜨거워졌다”는 관객 평처럼, 조용한 영화의 힘이 잘 살아 있다. 다만 일부에서는 “극적 갈등이 다소 약하다”는 지적도 있었지만, 그것이 오히려 영화의 진정성을 높였다는 반응도 많았다.
엄유나 감독은 “말은 마음을 담는 그릇이고, 그 그릇이 사라지면 마음도 사라진다”고 말했다. 그녀는 조선어학회의 사전 편찬 작업을 단지 언어학의 문제가 아니라, 식민지에서 스스로를 지키기 위한 가장 근본적인 싸움으로 이해하고 이 영화를 기획했다. 영화는 거창한 전투나 영웅적 희생이 아닌, 일상의 공간에서 조용히 이어진 민중의 저항을 담는다.
‘말모이’ 작업은 총칼 없이 싸운 독립운동이었다. 조선어학회 사건은 일제의 문화적 폭력에 맞선 지식인과 시민들의 연대였으며, 그것은 해방 후 한국어 체계 확립에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우리가 지금 쓰는 말, 글, 표현 하나하나에는 그런 사람들의 고통과 투쟁이 스며 있다. <말모이>는 단지 과거를 재현하는 영화가 아니라, 말을 지키는 일이 곧 우리 자신을 지키는 일임을 일깨우는 영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