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 – <끝나지 않은 세월>, 제주 4·3의 상처와 기억

<끝나지 않은 세월>(2005)은 김경률 감독이 연출한 제주 4·3 사건을 소재로 한 첫 장편 극영화로, 진상조사 보고서가 발표되던 2003년을 배경으로 현재와 과거를 오가며 4·3의 상흔을 돌아본다. 제주도민들의 참여로 제작된 이 영화는 실제 지역민의 감정과 언어, 문화적 특성을 그대로 녹여내며, 공동체의 상처를 따뜻하게 바라보는 시선을 전한다.
국가 권력에 의해 발생한 민간인 학살을 다룬 4·3 사건은 오랜 시간 금기시되어 왔다. <끝나지 않은 세월>은 정치적 메시지보다는 인간적 고통, 세대 간의 단절, 용서와 화해라는 보다 보편적인 주제를 담아내며 지금 우리에게 ‘기억의 자세’를 묻는다. 영화의 제목처럼, 세월은 흘렀지만 끝나지 않은 상처는 여전히 우리 곁에 있다.
영화는 2003년 제주 4·3 진상조사 보고서가 확정되던 시기를 배경으로, 고층 아파트에 사는 황가와 낡은 집에서 살아가는 60대 노인 형민이라는 두 인물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이들은 뉴스 속 ‘제주 4·3 사건’ 보도를 계기로 각자의 과거를 회상하고, 진실을 마주할 용기를 낸다. 회상 장면에서는 제주도 청년들이 무고하게 죽음을 맞이하고, 남은 가족들이 겪는 고통과 침묵의 시간이 섬세하게 묘사된다.
제주 4·3 사건은 1947년 3월 1일부터 1954년 9월 21일까지 약 7년간 제주도에서 벌어진 무력 충돌과 진압 과정에서 수많은 민간인이 희생된 비극적인 사건이다. 특히 1948년 남로당 무장봉기와 이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수천 명의 주민이 ‘빨갱이’로 몰려 학살되었으며, 이는 국가폭력과 반공주의, 냉전의 그림자가 드리운 대표적 현대사 사건이다.
영화는 실제 피해자 가족과 생존자들의 증언을 바탕으로 시나리오를 구성하였으며, 주요 장면들은 4·3의 역사적 사실에 충실하게 고증되었다. 또한 제주어와 민요, 지역 생활문화까지 적극적으로 반영해, 사건이 발생한 장소의 정서를 보다 생생하게 전달하고 있다.
<끝나지 않은 세월>은 2005년 제주영화제 트멍상을 수상하고, 대구평화영화제 개막작으로 상영되며 평단과 지역 관객으로부터 의미 있는 호응을 얻었다. “말하지 못한 기억을 영상으로 복원한 최초의 시도”, “현실적인 연출과 정서적 접근이 인상적”이라는 평가가 많았으며, 4·3 사건을 처음 접하는 관객에게는 진입 장벽을 낮추는 역할도 했다.
김경률 감독은 “역사의 진실을 기억하고, 화해와 상생을 지향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지역민의 정서와 일상을 통해 비극을 조명하고자 했으며, “4·3은 특정 이념이 아니라 사람들의 삶의 이야기”임을 말하고자 했다. 영화는 누구도 기억하지 않으려 했던 그날들을 조용히, 그러나 끈질기게 마주한다.
제주 4·3 사건은 단순한 지역의 비극이 아니라, 한국 현대사 전체가 감당해야 할 집단 기억이다. <끝나지 않은 세월>은 이를 처음으로 영상화한 작품으로서, 말하지 못했던 시대와 사람들의 목소리를 되살리는 데 큰 기여를 했다. 끝나지 않은 그 ‘세월’은, 우리가 이제서야 제대로 마주하게 되는 시간이다.